[아파트 하자 기획소송의 덫] ②고무줄 ‘법원 감정’
간단한 손보기로 끝날 사안까지
‘철거 후 전면 재시공’ 요구하기도
[대한경제=이승윤 기자] #. A건설사는 B아파트 주민들과 하자소송을 벌이고 있다.
처음에는 전체 222세대 중 10%가량인 23세대만 소송에 나섰다. 법원 감정인은 타일과 강마루를 철거한 뒤 전면 재시공하기 위한 비용으로만 약 4억원(세대당 1783만원)이 필요하다는 감정 결과를 내놨다. A사 측은 감정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새로운 감정인을 통해 전면 재감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도 재감정이 필요하다고 봤지만 ‘감정인의 자격을 뒤엎고 새로운 감정인을 지정한 사례는 없다’며 동일한 감정인에게 다시 전수조사를 맡겼다. 게다가 전수조사 과정에서는 감정인이 단 3가구만 직접 하자 여부를 조사한 데 이어 당초 소송을 낸 23세대가 아니라 222세대 전부를 기준으로 하자보수 비용을 산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B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도 하자소송에 나섰다. 하지만 앞서 시작된 소송과는 달리 감정에서는 타일과 강마루 하자보수비로 약 2500만원(세대당 11만원)만 책정됐다.
이처럼 같은 아파트인데도 감정 결과가 천차만별인 배경은 법원에서 선정하는 감정인의 판단 재량 폭에 있다. 이른바 ‘과잉 감정’이 이뤄지는 요인이다.
◇감정 결과, 소송 승패 가른다= 민사소송에서 전문가들이 내놓는 감정 결과는 소송의 승패와 가액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하자소송 등 건설 관련 분쟁에서는 감정 결과가 더욱 중요하다. 하자의 종류와 원인 등이 다양하고 복잡해 이를 해결하려면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만큼, 건설 분야의 비(非)전문가인 판사들로서는 감정 결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민사소송법은 감정인이 ‘양심에 따라 성실히 감정하고, 만일 거짓이 있으면 거짓감정의 벌을 받기로 맹세한다’고 선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형법은 법률에 따라 선서한 감정인이 허위 감정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통상 법원에서는 매년 9월께 공고를 내고 감정인 등록 신청을 받은 뒤 심사를 거쳐 12월께 감정인 명단을 만든다. 이 명단은 1년간 유지되고, 다음해 12월에 갱신된다.
대법원에 따르면, 전국 최대 규모의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502명(공사비 407명, 측량 95명)의 건설 분야 일반감정인이 등록돼 있다. 감정인은 여러 법원에 중복 등록할 수 있다.
실제 사건에서는 전산 프로그램을 통해 감정인을 무작위로 선정하는 게 원칙이다.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무작위로 감정인 후보 3명을 정한 뒤 감정료 견적 등을 받아보고 양쪽 당사자의 의견을 참고해 선정하는 경우도 있다.
관련 전문가 단체 등 외부기관ㆍ단체에 감정을 맡기는 ‘감정 촉탁’의 경우에는 선서 관련 규정도 적용되지 않는다.
◇층간균열이 대표적= 날이 갈수록 사건이 복잡해지면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감정인의 역할이 커지고 있지만, ‘과잉 감정’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파트 외벽의 ‘층간 균열’이다.
아파트 등 고층 건물을 지을 때 한꺼번에 모든 층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고, 콘크리트 특성상 한 층씩 쌓아 올리게 된다. 이 때 콘크리트가 굳는 시간 차이 때문에 위아래층의 콘트리트가 만나는 부분(층이음부)에서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게 된다.
과거 법원은 △층간 균열폭이 0.3㎜ 미만인 경우 접착제와 방수페인트를 칠하는 ‘표면처리공법’을 △균열폭이 0.3㎜ 이상인 경우 균열 부위를 V자나 U자로 파내고 보수재를 채워 넣는 ‘충전식 보수공법’을 적용해 보수비를 산정했다. 비용으로 따지면 ‘충전식>주입식>표면처리공법’ 순으로, 충전식 공법을 적용하면 보수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울중앙지법 건설소송실무연구회가 발간하는 ‘건설감정실무’가 2016년 개정된 이후 층간 균열에 대한 과잉 감정이 속출했다. 균열폭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충전식 공법을 적용해 보수비를 산정하도록 지침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자소송분야 전문가인 정홍식 법무법인 화인 대표변호사는 “(시공사 입장에서는) 돋보기를 대고 봐야 보일 수 있을 정도까지 문제 삼아 보수비를 산정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충전식 공법으로 보수비를 받더라도 실제로는 표면처리공법만으로 보수 공사를 마친 뒤 남은 보수비는 다른 용도로 쓰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 판결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이 지적될 정도다.
B아파트처럼 전유 세대 내의 일부 하자에 대해 간단한 손보기로 끝날 수 있는 문제인데도 ‘철거 후 전면 재시공’으로 보수비를 산출하는 경우도 다반사라는 게 법조계의 설명이다.
그나마 층간 균열의 경우 최근에는 층이음부에 방수키가 시공돼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예전처럼 균열폭 0.3㎜를 기준으로 보수공법을 구분하는 판결도 나오고 있다.
최근 광주고법은 C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시공사를 상대로 낸 하자보수보증금 등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층간 균열 부분에 대한 1심 판단을 뒤집었다.
광주고법은 “층이음부에 방수키가 시공돼 외기 유입, 침습으로 인한 누수, 결로, 단열성능 저하, 내구성 저하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층간 균열이라도 0.3㎜미만 부분에 대해서는 표면처리공법으로 보수해도 무방하다”며 1심보다 5502만원 적은 2713만원으로 하자보수비를 산정했다.
그러면서 “충전식으로 보수하는 과정에서 방수키의 단차가 있는 부분까지 파내면 오히려 공기나 물을 막아주던 방어막을 무력화할 수 있다”며 “개별적인 사정을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2016년 건설감정실무에서 정한 기준을 마치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 균열폭에 관계없이 충전식을 고집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내놨다.
◇감정인 통제ㆍ법관 전문성 강화 필요= 이와 함께 감정인이 원고와 피고 양쪽으로부터 금품을 받거나 다른 업자에게 감정을 맡긴 뒤 직접 감정한 것처럼 감정서를 제출하는 이른바 ‘감정 하도급’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있다. 민사소송법은 ‘감정인은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법원이 감정인을 통제할 뾰족한 방법은 없다는 게 법조계의 지적이다. 지금은 재판이 끝난 뒤 재판장이 감정인을 평가해 연말에 부적격자를 가리는 사후관리 수준에 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감정인이 감정 내역을 적정하게 산정할 수 있도록 법원이 통제ㆍ관리하는 방안과 함께 판사의 전문성을 높여 감정서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등 두 가지 측면에서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과거 건설전담부 재판장을 맡았던 D부장판사는 “감정 결과 자체가 적정하게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감정 결과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법관의 실력을 늘려 감정서를 취사 선택하면서 사실 인정을 위한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두 가지 측면에서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판사들이 감정인이 내놓은 감정 결과를 100% 수용하는 게 아니라, ‘재판부에서 보니 이런 범위 내에서는 감정이 잘못된 것 같다’는 식으로 감정 결과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어야 법원이 사실 인정을 할 때 제대로 된 감정 결과를 채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원은 과거 가사ㆍ소년 사건에만 실시해왔던 ‘전문법관’ 제도를 건설ㆍ의료 분야로 확대한 상태다. 대법원은 지난해 정기인사 당시 서울중앙지법에 건설 전문 부장판사 3명을 배치한 데 이어 올해에도 건설 분야 4명을 추가로 배치했고, 수원지법에도 건설 전문 부장판사 1명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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