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평가·판단하는 기준을 척도(尺度)라고 하고 시비·선악을 가리는 것을 변별(辨別)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 그 밖의 준거집단에서 옳고 그름, 규범과 질서 등을 끊임없이 배우고 익혔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다. 척도를 가지고 현상에 대해 변별하는 것은 공동체에서 숨 쉬고 사는 보통 사람들의 숙명이다.
보편적 윤리나 법 규범에 기반을 둬 들이대는 척도와 변별은 비교적 수긍하기 쉽고 심리적 저항이 적다. 공동체 내의 오랜 삶 속에서 녹아낸 것이거나 합의에 의해 강제화된 탓이다. 살인이나 도둑질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차이가 없지 않은가.
판·검사들은 업무적 영역에서 척도가 더 분명하고 변별에 익숙한 편이다. 실정법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법리를 적용해 판단하는 일상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양성과정에서 법 논리적 사고(Legal mind)를 강조 받은 영향도 있겠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되는 법적 분쟁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원 또는 검찰에서 심급과 불복절차를 거치며 법률적 판단이 마무리되었을 때 법 논리적 귀결에 다수가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 바람직하다.
시대와 사회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근년 들어 법원과 검찰의 판단과 결정에 대한 불신이 심화된 느낌이다. 수사구조 개편으로 책임이 강화된 사법경찰의 결정에 대한 불만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법조 1번지 서초동에는 곳곳에 플래카드가 설치되고 확성기가 등장한다.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주요 사건과 관련해서는 판결문이나 결정문이 냉철하게 분석, 비판되기보다 이·불리에 따라 진영 내지 집단 논리가 투영, 표출되기도 한다. 특히 특정 사건에 정치적 잣대를 들이댈 경우 담당 판검사는 졸지에 정치 판검사로 낙인찍혀 버리기 일쑤다.
씁쓸한 직업적 숙명이야 어쩔 수 없지만 법률가로서의 양심을 지키며 판단하고 결정했다면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다. 물론 그 전제는 일관된 척도와 이를 바탕으로 한 변별이다.
옥스퍼드대 MBA 초빙교수인 레이첼 보츠먼(Rachel Botsman)은 “신뢰이동”이라는 저서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지배적 양식의 신뢰가 확산되며, 현재 제도적 신뢰에 이어 분산적 신뢰 시대의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분석한다.
이러한 시각에 견주어 보면 법원·검찰 등과 같은 제도적 신뢰 부여기관의 권위가 과거와 같지 않은 것은 우리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 네트워크와 플랫폼 등을 통해 개인들 사이에 수평으로 오간다는 분산적 신뢰가 확산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제도적 신뢰를 모두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판·검사들의 직무상 권위는 시대 변화와 관계없이 매우 중요하다. 다만, 그 권위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척도와 변별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의 믿음을 전제로 한다. 격무 속에서도 소명을 다하고 있는 대다수 판·검사들을 응원하며 사회적 신뢰 제고를 위한 그들의 노력을 계속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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